책상 위의 신법전이 새것으로 바뀐 걸 보니 또 한해가 바뀐 모양이다. 앞으로 1년 동안 미우나 고우나 친하게 지내야 할 법전. 이 속의 면면들을 죽 훑어보니, 처음 보는 친구도 있고, 예전 모습 그대로인 친구도 있다. 성형을 조금 했거나 얼굴 화장만 고치고 나타난 친구도 있다.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난 오래된 친구들과 꼭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법령의 수명이 유난히 짧다. 예컨대 행정재판을 할 때에는 살아 있는 친구는 물론이고 죽은 친구의 무덤까지 찾아 헤매야 한다. 조세사건에서는 주로 죽은 친구들이 남긴 유언을 해석하느라 골머리가 아프다. 요즘은 법령데이터베이스가 충실해져서 개정연혁도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는 주로 50권짜리 현행법령집이나 책상 위의 법전을 벗 삼아 일을 한다.
현행법령집에 나오는 법령 중 가장 오래된 친구는 누구일까? 가장 오랫동안 변치 않은 법률은 사면법(赦免法)이다. 건국 직후인 1948년 8월 30일 법률 제2호로 태어난 이래 그 모습 그대로 수십 년 동안 법전에 실렸으니 놀라울 뿐이다.
물론 사면법보다 한달 먼저 태어난 법률 제1호 정부조직법이 있지만, 이 법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날씬해진다고 주장하면서 온갖 성형을 다하여 이제는 예전 모습이 다 사라졌기에, 현행법 중 최고참은 사면법이라고 해야 옳다. 제정된 이래 한번도 바뀐 적이 없으니 반세기 전에 유행하던 옷도 그대로 입고 있다.
아직도 판사가 ‘형의 언도(言渡)’를 하고, 죄인은 ‘형무소’에 갇혀 있으며, 이 땅에는 검사 대신에 ‘검찰관’이 있다.
사실 일찍이 다시 태어나고 새로워졌어야 할 사면법을 우리는 53년 세월이 넘도록 아무도 돌보지 않았고 그 화장을 고쳐주지도 않았다. 그렇게 법을 방치한 사이에 정치가 법치 위에 올라타서, 옆에 있는 친구나 이웃의 입장은 안중에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때로는 사고까지 쳐서 뭇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이 친구의 사망을 차마 바랄 수는 없지만, 권력분립원칙과 법치주의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적정하고도 예측가능성 있게 사면권이 행사되도록 하는 방향으로 화장만이라도 예쁘게 고치고 우리 곁에 다소곳이 나타나 우리들 모두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면 한다.
구스타프 라드부르흐(Gustav Radbruch : 1878-1949)는 사면은 기적이어야 한다고 했는데,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나라답게 우리나라에서는 기적이 너무 자주 일어나서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하도 많아서 하는 말이다. 새해부터는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는 그런 사면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2002년 1월 10일자 법률신문>
사면법은 2007년 12월 21일 법률 제8721호로 일부 개정되어, 사면심사위원회를 신설하고 법무부장관의 추천권을 신설하였으나, 나머지 부분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